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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일을 자꾸 늦추던 책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빌릴 책을 따로 정해 둔 것은 아니었다. 입구 옆 반납함에 책 몇 권이 비스듬히 포개져 있었고, 안쪽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마른 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새로 들어온 책이 놓인 낮은 서가부터 천천히 훑었지만 표지가 반듯한 책에는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한 바퀴를 다 돌고도 빈손이라 이번에는 오래된 책들이 몰려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바랜 푸른색 표지 한 권을 꺼냈다. 우연히 고른 책이었다. 책등의 글자는 절반쯤 닳아 있었고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종이처럼 부드러웠다. 첫 장에는 도서관 도장이 겹겹이 찍혀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날짜는 잉크가 번져 숫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가 언제 빌렸는지 적던 종이 봉투도 뒤표지 안쪽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대출 기록은 지워졌지만 봉투 아래쪽에는 연필로 눌러 쓴 짧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내용과 상관없는 흔적이었다. 그래도 한참을 들여다 봤다. 그 선이 이상했다. 서가 앞에 선 채로 첫 문단을 읽고 다음 장까지 넘겼다. 이야기는 비가 멎은 뒤 어느 집의 창문을 여는 장면에서 시작했는데, 특별한 사건은 없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냄새와 젖은 바닥의 빛만 오래 묘사되어 있었다. 사건이 빨리 시작되는 책을 찾았다면 도로 꽂았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그 느린 첫 장이 싫지 않았다. 책을 덮자 먼지가 손바닥에 묻었다. 대출대에서는 반납 날짜가 찍힌 종이만 받아 책 사이에 끼웠다. 아직은 얇은 종이였다. 돌아와서는 곧바로 읽지 않고 책을 평평한 곳에 내려두었다. 푸른 표지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첫 장의 열린 창문이 떠올랐지만, 막상 펼치면 오래 읽게 될 것 같아 몇 번이나 지나쳤다. 그러다 늦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문장은 조용했고 등장하는 사람들은 해야 할 말을 자주 삼켰다. 설명되지 않은 침묵이 이어질 때마다 앞장을 다시 넘겼으나 놓친 문장은 없었다. 원래 그런 이야기였다. 삼십 쪽쯤 읽었을 때 책 사이에서 대출 종이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종이를 주워 날짜를 확인하고서야 이미 며칠을 책상 위에만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은 쪽수를 세어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하루에 얼마씩 읽으면 되는지 계산하려다가 그만두고 책갈피를 중간에 끼웠다. 빨리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뒤부터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줄을 세 번 읽었다. 날짜가 방해했다. 다음 날에는 대출 종이를 뒤표지 봉투 안으로 밀어 넣고 보이지 않게 했다. 반납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펼칠 때마다 먼저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 뒤로는 한 번에 열 장을 읽기도 했고 두 장만 읽고 덮기도 했다. 이야기 속 방들은 조금씩 비어 갔으며 처음에 열렸던 창문은 좀처럼 다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창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책의 절반을 넘긴 뒤에야 알아차렸다. 왜 기다리는지는 몰랐다. 그냥 계속 읽었다.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첫 장의 창문이 다시 언급되었다. 누군가 창틀에 남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닦았다는 한 문장이 전부였고, 오래 기다린 것에 비하면 너무 짧았다. 앞에서 쌓인 일들이 그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덮어 둔 장면 하나를 잠깐 확인하고 지나가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그 대목에서 책을 덮고 푸른 표지를 오래 바라봤다. 끝까지는 스무 쪽이 남아 있었다. 그날은 거기까지였다. 반납일 아침에 남은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 장에는 누군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면도 없었고, 처음부터 이어지던 방 안의 빛이 조금 옮겨 갔다는 문장만 남아 있었다. 다 읽었다는 표시로 대출 종이를 꺼내려다 뒤표지의 낡은 봉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연필로 눌러 쓴 선은 여전히 아무 뜻도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그 옆에 손톱만 한 종이 보풀이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눌렀다가 멈췄다. 떼지는 않았다. 도서관에 책을 돌려주러 갔을 때 반납함 입구가 생각보다 좁았다. 책을 밀어 넣으면 안쪽 경사면을 따라 금세 미끄러졌고, 푸른 표지는 다른 책 아래로 사라졌다. 손에 남은 것은 접힌 대출 종이 한 장뿐이었다. 그것도 버리려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빌릴 생각은 없었지만 책의 첫 문장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했는지 벌써 희미했다. 창문이 먼저였는지 비 냄새가 먼저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종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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