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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기록
읍내까지 이십 분. 그 시간에 생각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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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글이 나를 얼마나 드러낼까요
공개 글을 모아서 파도풀이 살펴봐요.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없어도 흩어진 단서가 합쳐지면 사람이 특정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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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15편
장날이 아닌 오후의 도서관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의 읍내는 이상할 만큼 넓어 보인다. 평소라면 천막과 손수레가 차지할 자리에 햇빛만 길게 누워 있었고, 문을 반쯤 내린 가게 앞에는 접힌 종이 상자 몇 개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인데도 거리는 저녁 무렵처럼 잠잠했다. 건너편 분식집 유리문에 붙은 메뉴판이 바람에 들썩였지만 안쪽에서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면사무소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표 아래 적힌 다음 차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삼십 분이면 짧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날은 앉아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거리가 비어 있었다.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읍내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버스를 놓친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한 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셈이었다. 장날에는 사람 어깨를 피해 걷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철물점 바깥에 세워 둔 빗자루의 붉은 손잡이, 오래된 세탁소 창문 안에서 돌아가는 옷걸이, 약국 출입문 아래로 말려 들어간 광고 종이 같은 것들이었다. 광주에서 오는 시외버스가 큰길을 한 번 지나가자 먼지가 낮게 일었고, 다시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에서 도서관까지는 몇번 와 본 길인데도 가게 셔터가 내려가 있으니 방향이 낯설었다. 평일 오후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도서관에 갈 생각은 정류장을 벗어난 뒤에야 들었다. 가방 안에는 오전에 검토하던 출력물과 다 읽지 못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고, 어느 쪽도 지금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냉방이 되는 곳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 건물의 반사 유리에 내 모습이 작게 겹쳤다. 출근할 때 입은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은 채였고, 장을 볼 계획이 없어서 빈 장바구니조차 들고 나오지 않았다. 장날이 아닌 날에는 필요한 물건이 없는 사람처럼 걷게 된다. 목적은 뒤늦게 생겼다. 도서관 자동문이 열리자 마른 종이 냄새와 바닥 세정제 냄새가 한꺼번에 났다. 안내대 옆 반납함에는 책이 서너 권뿐이었고, 어린이 열람실에서는 색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나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를 골라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가에 앉으면 밖을 오래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버스 시각을 놓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꺼내고도 첫 장을 넘기지 못한 채 유리창에 비친 책장만 바라봤다. 사무실에서는 숫자 하나와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 쉬는 시간에는 짧은 문단도 자꾸 눈에서 미끄러진다. 그날도 그랬다. 한참동안 책을 펴 둔 채 빈 종이에 해야 할 일만 적었다. 저녁에 쌀을 씻어 둘 것, 세탁기에서 꺼낸 수건을 개킬 것, 남편에게 우산을 차에 두었는지 물어볼 것. 적고 보니 도서관까지 와서 쓸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펜 끝으로 목록의 네모 칸을 하나씩 그리다가 창밖을 보니, 아까 지나온 거리로 작은 화물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운전자는 문을 연 가게를 찾는 듯 몇 번 속도를 줄였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 차가 사라진 뒤에는 바람에 밀린 비닐 한 장만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참, 도서관 벽시계는 집에 있는 시계보다 유난히 크게 초를 넘겼다. 다음 버스까지 십 분이 남았을 때 책을 덮었는데, 읽은 것은 겨우 여섯 쪽이었다. 반납할 책은 안내대에 놓고 빌릴 책 두 권은 무인 기계로 처리했다. 영수증처럼 얇은 대출 확인표가 나오자 책 사이에 끼워 가방에 넣었다. 자동문 밖으로 나서니 들어올 때보다 햇빛이 기울어 있었고, 빈 거리의 그림자도 건물 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긴 뒤였다. 나는 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정류장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버스를 기다렸다. 면사무소 앞에는 아까 없던 사람이 두 명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봉지를 발밑에 내려놓았고, 다른 사람은 접은 양산 끝으로 보도블록 틈을 가만히 건드렸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며, 셋 모두 말없이 같은 방향만 바라봤다. 잠시 뒤 굽은 길 너머로 버스 앞유리가 번쩍였고, 정류장 표지판 옆의 마른 풀이 먼저 흔들렸다. 나는 가방 속 책 모서리가 출력물을 구기지 않도록 손으로 한번 눌렀다.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도서관 대출 확인표의 얇은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버스가 천천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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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날의 부엌
아침부터 비가 얇고 끈질기게 내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라면 창문을 닫고 돌아서기라도 쉬운데, 오늘 비는 그칠 듯 말 듯 유리 위에 작은 물방울만 자꾸 보탰다. 주전자에 물을 올려 두고 한참동안 그 모양을 바라봤다. 물이 끓는 동안 차가운 컵을 꺼냈다가 다시 넣고, 결국 따뜻한 차를 마시기로 했다. 날씨가 흐리면 사소한 선택 하나에도 마음이 오래 걸린다. 별일 없는 오전이었다. 차를 반쯤 마셨을 때 갑자기 감자전이 먹고 싶어졌다. 감자는 있었지만 강판을 꺼내고 설거지를 늘릴 생각을 하니 벌써 귀찮았다. 얇게 채를 썰어 부치면 간단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나서 칼부터 꺼냈다. 막상 썰기 시작하니 굵기가 제멋대로였고, 가느다란 조각 옆에 손가락만 한 조각이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었다. 잘 부쳐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소금을 조금 넣고 뒤적였다. 기름 냄새가 먼저 퍼졌다. 팬에 올린 감자는 처음부터 한 덩어리가 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뒤집개를 넣을 때마다 가장자리가 흩어졌고, 욕심을 내어 한 번에 뒤집었다가 가운데가 반으로 갈라졌다. 결국 작은 조각들을 하나씩 눌러 붙이며 모양을 수습했다. 접시에 옮기고 보니 전이라기보다는 바삭하게 구운 감자 부스러기에 가까웠지만, 간장에 찍어 먹으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실패한 음식은 이상하게 빨리 먹게 된다. 모양만 엉망이었다. 남은 반죽을 부치려는데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친구가 정리하다 나온 옷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는데, 색이 너무 밝은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언니가 창원 살아서 아이 옷은 늘 거기서 얻어 온다. 나는 사진을 한참 넘겨보다가 노란색이 제일 낫다고 짧게 답했다. 답을 보내고 다시 팬을 보니 감자 가장자리가 진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잠깐이면 충분했다. 불을 줄이고 탄 부분만 젓가락으로 떼어 냈다. 이상하게도 두 번째 장은 첫 번째보다 모양이 반듯했지만 맛은 덜했다. 기름이 부족했는지 가운데가 축축했고, 소금을 더 넣었더니 한쪽만 유난히 짰다. 음식을 할 때마다 적당히라는 말이 가장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적당한 불과 적당한 기름과 적당한 시간은 결과를 본 뒤에야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래도 접시는 비었다. 그건 그렇고, 비 오는 날에는 소리가 평소보다 가까이 붙는 느낌이 든다.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컸고, 팬을 닦을 때 수세미가 스치는 소리도 괜히 선명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털다가 소매 끝을 조금 적셨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두었더니 축축한 감촉이 자꾸 손목에 닿았다. 이런 건 금방 잊을 듯하면서도 오래 신경 쓰인다. 비는 그대로였다. 오후에는 미뤄 둔 드라마를 한 편 틀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중요한 말을 앞에 두고 자꾸 창밖을 보거나 물을 마셨고, 나는 그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아까 남긴 감자 조각을 집어 먹었다. 차갑게 식은 감자는 바삭함이 사라져 있었지만 짠맛은 오히려 또렷했다. 다음 장면을 기다리다 창문 쪽을 보니 물방울 몇 개가 느리게 아래로 합쳐지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끝날 기색은 없었다. 드라마도 비도 늘어졌다. 한 편이 끝난 뒤에도 자동으로 넘어가는 다음 회차를 끄지 못했다. 새 이야기가 시작되는 짧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빈 접시를 치울까 말까 망설였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부엌에 남은 냄새 때문에 자꾸 무언가 더 먹고 싶어졌다. 찬장을 열어 마른 과자를 하나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대신 식어 버린 차를 두 모금 마셨다. 맛이 묘하게 떫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빗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어두워진 창문에는 방 안의 불빛만 흐리게 비쳤고, 낮에 닦아 둔 팬은 아직 건조대 위에 기울어 있었다. 감자 냄새는 거의 빠졌는데 기름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손을 씻고도 손끝에서 소금기가 느껴지는 듯해 물에 한 번 더 헹궜다. 휴대전화에는 아까 보낸 답 아래로 노란색을 골랐다는 짧은 회신이 와 있었다. 나는 화면을 끄고 다시 빗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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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을 닫으면 시작되는 목소리
차 문을 닫고 라디오를 켜면 늘 같은 목소리가 나온다. 정확히는 늘 같은 시간에 맞추려 한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그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차 안에 있게 된다. 첫 인사보다 먼저 흐르는 짧은 음악을 들으면 오늘도 제자리에 왔다는 기분이 든다.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찾아 들은 적이 없다. 다시 듣기 목록에 넣어 두지도 않았고, 방송 내용을 따로 검색해 본 일도 없다. 차 안에서만 충분하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고, 문장 끝을 조금 남겨 두는 버릇이 있다. 웃을 때도 크게 터뜨리지 않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가 짧게 웃는다. 처음에는 그 호흡이 어색해서 다음 말을 자꾸 기다리게 됐다. 이제는 그 작은 틈까지 방송의 일부처럼 들린다. 말을 멈춘 동안 송풍구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가 섞이고, 바깥의 희미한 소음이 유리 너머로 지나간다. 그 몇 초가 좋다. 방송은 대체로 비슷한 순서로 흘러간다. 시작 음악 뒤에 짧은 이야기, 사연 두어 개, 오래된 노래 한 곡, 다시 목소리가 이어진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밋밋할 만한 구성인데, 나는 그 순서가 조금만 달라져도 먼저 알아차린다. 오늘은 사연이 일찍 나왔구나, 평소보다 노래가 길구나 하고 생각한다. 익숙함은 그런 식이다. 한번은 방송 중간에 잡음이 끼면서 목소리가 잘게 부서진 적이 있었다. 볼륨을 낮췄다가 다시 올리고, 주파수가 흐트러졌나 싶어 손을 뻗었지만 화면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몇 마디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지더니 갑자기 선명해졌다. 정작 놓친 내용은 별것 아니었을 텐데 그날은 계속 앞부분이 궁금했다. 진행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사연을 읽었다. 나만 잠깐 밖에 남았다. 사연을 보낸 사람들은 이름 대신 짧은 별칭으로 불린다. 별칭은 금세 잊는데 사연 속 한 문장만 이상하게 오래 붙어 있는 날이 있다. 서랍을 열었다가 왜 열었는지 잊었다는 이야기, 대답할 말을 늦게 떠올렸다는 이야기처럼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조각들이다. 나는 그 문장을 듣고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방송이 다음 순서로 넘어간 뒤에 한 번 더 떠올린다. 목소리보다 늦게 남는다. 선곡은 아는 노래와 모르는 노래가 반반쯤 섞인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제목을 확인하지 않고 첫 소절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린다. 기억한 전주가 맞으면 작은 답을 맞힌 기분이 들고, 틀리면 비슷한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한참 더듬는다. 모르는 노래는 더 편하다. 가사를 붙잡지 않아도 되고, 제목을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다. 흘러가게 둔다. 참, 이 프로그램은 차 밖으로 가져가는 순간 모양이 달라질 것 같다. 이어폰으로 들으면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울 것 같고, 넓은 공간에 틀어 두면 문장 사이의 정적이 너무 커질 듯하다. 차 안에서는 소리가 앞유리와 천장에 한번 부딪혀 둥글게 돌아온다. 좌우에서 나뉘어 나오던 음악도 어느 지점에서는 한 덩어리가 된다. 방송을 듣는다기보다 잠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에 가깝다. 문을 열면 끝난다. 프로그램이 마칠 때 진행자는 내일의 내용을 길게 예고하지 않는다. 정해진 인사를 하고 끝 음악이 올라오면 목소리가 그 아래로 천천히 잠긴다. 나는 끝까지 듣는 날보다 중간에 끄는 날이 더 많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 다음에 라디오를 켰을 때 어제의 문장이 이어질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번 조금씩 잘린 채로 남는다. 어느 날에는 같은 프로그램이 아닌 줄 알고 잠시 화면을 확인한 적도 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밝았고, 첫 음악도 낯설어서 다른 방송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몇 분 뒤 익숙한 코너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손을 거뒀다. 같은 목소리도 날마다 똑같이 들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방송이 달라진 건지 듣는 쪽이 달라진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차 안이 조용한 날이면 라디오를 켜기 전의 몇 초가 유난히 길다. 버튼을 누르면 언제나처럼 목소리가 나올 것 같다가도, 전혀 다른 노래나 광고가 먼저 흘러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까지 채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다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호가 닿고 음악이 걷히고, 마침내 익숙한 첫 문장이 들린다. 그제야 소리가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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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다 책을 빌린 날
아침부터 하늘이 낮았고, 점심을 넘기자 창문 바깥의 은행나무 잎이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졌다. 퇴근할 무렵에는 비가 그쳤지만 운동장 가장자리와 배수로에는 탁한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차를 가져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 안에 반납할 책이 있다는 생각이 나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집으로 바로 가면 다시 나오지 않을 게 뻔했고, 반납 날짜는 이미 이틀을 넘긴 뒤였다. 사무실 현관에서 우산을 접어 넣고 면사무소 앞 정류장까지 걸었다. 바닥은 아직 젖어 있었다. 정류장 지붕 아래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가 세 칸 놓여 있었는데, 가운데 자리에 빗물이 고여 아무도 앉지 못했다. 양쪽 끝에는 장바구니를 발밑에 둔 사람이 하나씩 앉아 있었고 나는 시간표가 붙은 기둥 옆에 섰다. 종이 시간표의 모서리는 습기를 먹어 안쪽으로 말렸고, 저녁 차가 몇 시였는지 볼 때마다 숫자가 흐릿하게 겹쳤다. 휴대전화로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화면을 꺼낸 채 그냥 도로 끝을 보고 있었다. 젖은 논 쪽에서 바람이 한 번씩 밀려오면 정류장 뒤편의 작은 깃발이 힘없이 뒤집혔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차로 지나쳐서 몰랐는데, 그 자리에 서 있으니 퇴근 시간의 길이 생각보다 조용했다. 승용차 몇 대가 물기를 가르며 지나갔고 운전자들은 신호도 없는 삼거리에서 잠깐 속도를 줄였다가 곧 사라졌다. 길 건너 세탁소는 불이 꺼져 있었고, 그 옆의 빈 점포 유리에는 맞은편 가로수만 어둡게 비쳤다.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의 거리는 원래 이랬지만 비까지 그친 뒤라 사람의 흔적이 더 얇아 보였다. 장날에는 통행을 막던 천막 자국과 테이프 조각이 보도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 기다림만 길어졌다. 십오 분쯤 지나서야 버스 앞유리의 불빛이 굽은 길 너머로 나타났고,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장바구니를 들었다. 문이 열리자 젖은 옷과 오래된 시트에서 나는 냄새가 미지근한 난방 바람에 섞여 나왔다. 나는 뒤쪽 창가에 앉아 가방 속 책의 모서리가 접히지 않았는지 손으로 한 번 짚었다. 차로 달리면 익숙한 길인데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자 논과 창고와 낮은 지붕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풍경처럼 보였다. 정류장마다 멈추는 동안 기사 옆의 작은 시계 숫자만 꾸준히 바뀌었다. 읍내까지는 오래 걸렸다. 도서관 앞에서 내렸을 때는 다시 가는 비가 시작되어 현관까지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거리가 괜히 멀게 느껴졌다. 자동문 안쪽의 고무 매트에는 젖은 신발 자국이 여러 방향으로 겹쳐 있었고, 반납함 위에는 물기를 닦으라는 수건이 접혀 있었다. 책을 꺼내 기계에 올리니 반납 날짜를 알리는 문구가 화면 한가운데 잠깐 떴다가 사라졌다. 연체한 날만큼 대출이 멈춘다는 안내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직원이 볼까 싶어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괜한 마음이었다. 그냥 돌아가려다가 비가 굵어져 창가의 긴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동안 서가 사이를 걸었다. 새로 들어온 책은 표지가 반듯했고, 오래 꽂혀 있던 책은 책등의 제목이 손가락 높이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빌릴 수 없는 날인데도 습관처럼 두 권을 뽑아 목차를 읽고, 다시 넣을 자리를 잊지 않으려고 옆 책을 조금 비스듬히 세워 두었다. 창밖에서는 저녁 버스가 한 대 지나갔고, 젖은 도로 위로 붉은 불빛이 길게 번졌다. 다음 차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자 서둘러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한 시간은 애매했다. 아 맞다, 가방 바닥에는 아침에 챙긴 작은 보온병도 그대로 있었다. 휴게실에서 마시려고 담아 온 차였는데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잊었고, 뚜껑을 열자 미지근한 향만 남아 있었다. 도서관 안에서는 음료를 마실 수 없어 다시 닫았는데, 그 사소한 동작이 하루 종일 미뤄 둔 일을 되짚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납할 책을 며칠씩 들고 다닌 일도, 버스 시간을 제대로 보지 않고 정류장에 선 일도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뒤로 밀어 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날 갑자기 부지런해진 것은 아니었다. 빗소리만 들었다. 폐관 안내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창가에 앉아 빗물이 유리 아래로 모이는 모습을 보았다. 먼저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흐르면 작은 물방울 몇 개가 따라붙었고, 중간에서 멈춘 것은 한참 그대로였다. 책상 맞은편 자리에는 누군가 연필로 눌러 쓴 자국이 빛을 비스듬히 받을 때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슨 글자였는지는 읽히지 않았고, 굳이 알아보려고 고개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다시 정류장으로 나왔을 때 비는 거의 그쳤고 젖은 가로등 아래로 빈 버스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보온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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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아침
새벽부터 비가 유리창을 잘게 두드렸고, 한동안 그 소리만 들으며 이불 끝에 손을 얹고 있었다. 많이 내리는 비는 아니었지만 좀처럼 그칠 기색도 없어서 방 안의 모든 물건이 평소보다 무겁게 보였다. 이런 날에는 일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대신 빗소리가 몇 가지나 되는지 세어 보게 된다. 창을 바로 때리는 소리와 어딘가에 고였다가 떨어지는 소리, 바람에 밀려 비스듬히 긁고 가는 소리가 제각각이었다. 듣다 보면 시간이 늘어난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찬장을 열었는데 먹고 싶은 것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따뜻한 국물은 당겼지만 처음부터 무언가를 끓일 만큼 마음이 부지런하지는 않았다. 결국 작은 그릇에 마른 과자를 조금 덜고, 우유를 데워 천천히 부었다. 금방 눅눅해질 것을 알면서도 한꺼번에 붓는 편이 좋다—바삭한 부분과 풀어진 부분을 번갈아 먹는 재미가 있어서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는 빗소리보다 또렷했고, 나는 그 단순한 소리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 별것 아닌 아침이었다. 식탁 위에 둔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숫자는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린이집 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서두르고 나면 아침 회의는 늘 몇 분쯤 먼저 시작되어 있었고, 제시간을 지킨 날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화면 한쪽에 남은 시각을 볼 때마다 변명할 문장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누구에게 길게 설명할 일도 아닌데 혼자서 말의 순서를 고치는 버릇만 늘었다. 오늘은 비 때문에 조금 더 늦어질까 싶었지만 그런 예상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문제는 몇 분이었다. 정리가 끝난 뒤에도 비는 여전히 같은 굵기로 내리고 있었다. 식탁을 닦다가 창 쪽이 환해진 듯해 고개를 들었는데, 구름 사이가 잠깐 옅어졌을 뿐이었다. 햇빛이 들려다 마음을 바꾼 것처럼 희미한 밝음만 남았다. 나는 젖은 행주를 펴 놓고 남은 우유를 다시 데웠다. 아까보다 단맛이 약하게 느껴져 꿀을 반 숟갈 넣었더니 이번에는 지나치게 달았다. 적당한 맛은 늘 짧다. 아 맞다, 어젯밤에 보던 드라마는 끝을 십 분 남겨 두고 멈춰 있었다. 결말이 궁금해서 틀어 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잘못을 인정하면 모든 장면이 금방 정리될 텐데, 그 사람은 자꾸 다른 말을 꺼내며 시간을 벌었다. 답답하면서도 이해가 됐다—정확한 말을 고르는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이 있으니까. 재생 버튼을 누를까 하다가 아직은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이라는 생각에 화면을 덮었다. 결말은 그대로 남았다. 점심에는 냉장고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재료로 국수를 만들었다. 물이 끓는 동안 양념을 섞었는데 고춧가루가 생각보다 많이 쏟아져 설탕을 조금 더 넣고, 다시 식초를 보탰다. 덜어내면 간단했을 일을 자꾸 다른 맛으로 덮다 보니 작은 그릇이 거의 가득 찼다. 면을 건져 찬물에 헹구는 동안 손끝에 닿는 물이 지나치게 차가워서 수도를 몇 번 잠갔다 켰다. 완성된 국수는 맵고 달고 시어서 어느 맛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다 먹었다. 먹고 난 그릇을 바로 씻지 않고 한참동안 식탁에 두었다. 빗물이 창을 따라 내려오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길고 반듯한 줄 하나가 중간에서 다른 물방울과 만나 갑자기 굵어졌다. 아래로 흐르던 자국은 잠시 갈라졌다가 다시 붙었고, 먼저 도착한 물은 창틀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보고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붙잡지 못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가라앉았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빗소리는 줄었지만 방 안에 밴 습기는 그대로 남았다. 아침에 펼쳐 둔 행주는 아직 축축했고, 책상 위 종이 한 귀퉁이도 살짝 들려 있었다. 드라마의 남은 십 분을 마저 보았는데 기다린 것에 비해 결말은 아주 조용했다. 끝내 사과하지 않던 사람은 문을 닫고 나갔고, 남은 사람은 빈 의자를 한 번 바라본 뒤 컵에 물을 따랐다. 화면이 어두워진 뒤에도 나는 다음 편을 틀지 않았다. 창밖에는 비가 거의 멎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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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입술이 오래 머뭇거리던 날
아이는 바닥에 앉아 납작한 나무 조각을 줄지어 놓고 있었다. 둥근 것과 네모난 것을 번갈아 세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바닥으로 한꺼번에 밀어 버렸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말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다. 그 무렵의 아이는 뜻을 가진 소리를 제법 냈고 익숙한 낱말 몇 개도 말했지만, 둘 이상의 말을 이어 붙인 적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싫으면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니 서로 알아듣는 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바닥에는 아까 밀려난 조각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이는 그중 노란 조각 하나를 집어 들더니 내 쪽을 보며 짧은 소리를 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지만 모르는 얼굴을 하고 기다렸다. 평소라면 내가 먼저 짐작해서 건네거나 치워 주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이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아이는 손에 든 조각을 흔들고 다시 바닥을 가리킨 뒤,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한참이 흘렀다. 나는 숨을 죽였다. 아이는 입안에 걸린 것을 꺼내듯 아주 천천히 말했다. “이거 여기 놔.” 낱말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었고 마지막 소리는 거의 속삭임처럼 내려앉았다. 문법이 맞는지 발음이 또렷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의 마음이 세 개의 말에 실려 내 앞까지 건너왔다는 사실만 분명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가 가리킨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파란 조각과 빨간 조각 사이로 노란 조각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빈틈이 남아 있었다.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노란 조각을 받아 그 빈자리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아이는 잠깐 고개를 기울여 줄을 살피더니 만족한 듯 손끝으로 조각들을 하나씩 눌렀다. 다시 말해 보라고 시키면 방금 들은 문장이 사라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기쁜 마음이 먼저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기쁨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박수를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면 아이가 자기 말보다 내 반응을 먼저 기억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응, 여기 놓을게”라고 답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금 뒤 아이는 같은 문장을 다시 말하지 않았다. 다른 조각을 집어 들고는 익숙한 소리를 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줄을 또 손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방금 전의 일은 아이에게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은 준비를 마친 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놀다가 우연히 발견한 틈으로 불쑥 빠져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소리 내어 따라 하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옮기는 순간 내 기억이 아이의 실제 목소리를 덮을 것 같았다. 방 안은 다시 조용했다. 참, 그날 처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동안 나는 소리만 기다렸지만, 아이는 오래전부터 문장을 만들 재료를 모으고 있었던 듯하다. 내가 무심히 건넨 말, 물건을 놓는 순서, 손가락이 향한 자리와 기다리는 표정까지 조용히 쌓아 두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꺼낸 것이었다. “이거”와 “여기”와 “놔”는 전부터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는데, 아이의 입에서 이어지자 전혀 다른 모양이 되었다. 짧은 문장 안에는 부탁도 있었고 선택도 있었으며, 내가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세 마디뿐이었다. 그런데 넓었다. 나는 한동안 바닥의 빈자리만 바라보았다. 아이가 처음부터 그 자리를 비워 둔 것인지, 조각을 늘어놓다가 우연히 생긴 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이는 그 빈틈을 보고 원하는 모양을 떠올렸고, 혼자 손을 뻗는 대신 나를 불러 그 마음을 옮겼다. 말이란 결국 혼자 알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조차 그날의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큰 설명이었다. 아이는 그저 노란 조각이 거기에 놓이기를 바랐고 나는 알아들었다. 그 단순한 주고받음이 오래 남았다. 아직도 목소리가 선명하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에도 조각들은 그대로 바닥에 놓여 있었다. 치우려다가 노란 조각 앞에서 손이 멈췄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무슨 표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여 줄을 흐트러뜨리기가 아까웠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까 만든 모양에는 아무 미련도 없어 보였다. 나는 결국 조각을 하나씩 모아 상자에 넣었고 노란 조각도 마지막에 넣었다. 뚜껑을 닫는 순간 낮게 이어지던 세 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이거 여기 놔. 그날의 문장은 거기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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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오후
아침부터 비가 창문을 가늘게 두드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금방 그칠 기색도 없이, 유리 위에 맺힌 물방울만 자꾸 아래로 밀려났다. 이런 날에는 시간을 확인해도 숫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이만큼밖에 안 지났나 싶다가도, 한참 멍하니 있었던 듯 오후가 불쑥 와 있다. 물을 끓여 잔에 붓고 나니 김이 안경 앞을 잠깐 가렸다. 차 맛은 평소보다 옅었다. 찻잎을 덜 넣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닫았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닌데 입안이 심심했고, 그렇다고 단것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 서 있다가 감자 두 알을 씻어 얇게 썰었다. 기름을 조금 두른 팬에 겹치지 않게 올렸더니 가장자리부터 투명해졌다. 소금을 손끝으로 집어 뿌리다가 한쪽에 너무 많이 떨어져 그 부분만 털어냈다. 빗소리 사이로 기름 튀는 소리가 섞였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감자는 생각보다 천천히 익었다. 뒤집개로 자꾸 건드리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가장자리를 들춰 봤다. 노릇한 면이 나타날 때마다 괜히 잘한 일처럼 느껴졌다. 요리는 결과보다 기다리는 동안의 냄새 때문에 하게 되는 날이 있다. 접시에 옮긴 감자는 가운데가 조금 덜 익었고, 소금을 털어낸 자리에는 아무 맛도 없었다. 그래도 뜨거울 때 거의 다 먹었다. 남은 것은 세 조각이었다. 비는 그사이 더 촘촘해져 있었다. 창밖이 흐려지니 방 안의 작은 불빛들이 낮인데도 또렷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젖은 손을 닦은 뒤, 식탁 한쪽에 밀어 두었던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며칠 전부터 익혀 보겠다고 적어 둔 내용이 있었는데 첫 줄부터 낯설었다. 설명을 두 번 읽고도 순서를 반대로 적어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서른여덟. 이 나이에 다시 배운다는 말을 이렇게 자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말을 적고 보니 조금 우스웠다. 배운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보다 지우개 가루나 식어 버린 차에 더 가까웠다. 알았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다시 멈추고, 방금 읽은 문장을 또 찾고, 표시한 곳을 못 보고 페이지를 넘겼다. 어제는 자연스럽게 되던 것이 오늘은 엉키기도 했다. 반대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 것이 갑자기 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 차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은 잘 안 됐다. 아 근데 감자 냄새가 계속 남아 있는 바람에 종이를 보다가도 접시 쪽으로 눈이 갔다. 남겨 둔 세 조각은 이미 식어서 가장자리가 살짝 굳어 있었다. 하나를 집어 먹으니 뜨거울 때보다 소금 맛이 진했고, 가운데의 덜 익은 부분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도 두 번째 조각까지 먹었다. 마지막 하나는 괜히 아껴 두었다가 종이에 기름 자국만 남겼다. 손가락을 닦고 다시 펜을 들었는데 방금 틀린 순서를 또 틀렸다. 왠지 웃음이 났다. 한동안은 펜 끝으로 종이 귀퉁이만 눌렀다. 빗줄기가 약해진 듯했지만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는 일정했다. 조금 전까지 답답했던 문장이 가만히 두고 보니 전보다 덜 낯설었다.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에서 막혔는지는 알 것 같아 그 부분에 짧은 선을 그었다. 선이 비뚤어 다시 그으려다가 그대로 뒀다. 감자 한 조각도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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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마당에 길을 내던 날
비가 그친 뒤에도 마당 한쪽은 한동안 젖은 채로 남아 있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물이 흙바닥을 얕게 파고, 그 자리에 탁한 물이 길쭉하게 고여 있었다. 처음에는 비가 많이 왔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한참 지나 다시 나가 보아도 물 높이가 거의 줄지 않았다. 장화를 신고 가장자리를 밟자 검은 진흙이 발등 가까이 밀려 올라왔고, 안쪽에서는 갇혀 있던 공기가 둔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배수구까지 이어져야 할 물길은 중간에서 흐려져 있었고, 흙과 낙엽이 겹친 부분부터 물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졌다. 비가 오는 동안에는 온통 물이라 보이지 않던 높낮이가, 비가 멎고 나니 고인 자국으로 또렷하게 드러났다. 물은 길을 잊었다. 삽을 가져와 배수구 앞을 조금 걷어 냈더니 눅눅한 낙엽 아래에서 잔가지와 흙덩이가 한꺼번에 나왔다. 배수구 입구만 막힌 줄 알았는데 그 앞쪽 흙도 오래 눌려 단단해져 있었고, 물이 스며들 틈보다 옆으로 밀려날 틈이 더 커 보였다. 삽날을 비스듬히 넣을 때마다 젖은 흙이 무겁게 들려왔으며, 한 덩이를 털어 내면 그 아래에서 더 짙은 색의 흙이 나타났다. 괜히 넓게 파면 마당 전체가 질척해질 것 같아 우선 손바닥 두 개 정도의 폭만 건드리기로 했다. 배수구를 향해 얕은 홈을 내고, 홈 끝에 남은 찌꺼기는 작은 삽으로 긁어 모았다. 고여 있던 물은 곧장 빠지지 않고 잠시 망설이듯 흔들렸다. 문제는 경사였다. 물이 고인 자리와 배수구 사이를 눈으로만 재어 보니 거의 평평했지만, 막대 하나를 눕혀 보니 가운데가 미세하게 솟아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위쪽에서 흙이 밀려와 쌓였는지, 원래 그렇게 다져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솟은 부분을 얇게 걷어 내자 고인 물 끝이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고, 탁한 표면 위로 가느다란 줄 하나가 생겼다. 그 줄을 따라 삽 끝으로 홈을 더 이어 주니 물이 갑자기 속도를 내며 배수구 쪽으로 흘렀다. 시원하다는 말보다 먼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처음부터 물이 가려는 방향을 보고 팠으면 흙을 덜 뒤집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미 젖은 장갑과 삽자루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뒤늦게 조심해 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이제 물이 움직였다. 물이 빠진 바닥에는 작은 돌과 가는 뿌리가 드러났고, 그 사이로 얕은 골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반듯하게 만들고 싶어 삽날로 양쪽 벽을 다듬었지만,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 흙이 무너져 내려 처음보다 폭만 넓어졌다. 결국 모양을 맞추는 일은 그만두고 물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큰 돌만 골라 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돌 하나가 홈 한가운데 깊이 박혀 있었는데, 주변 흙을 걷어 내도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삽 끝을 아래로 밀어 넣어 지렛대처럼 들어 올리자 돌이 툭 빠졌고, 그 자리에 고인 흙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 구멍은 그대로 두면 다시 흙이 쓸려 들어갈 듯해 마른 자갈 몇 개로 채웠다. 너무 손봤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배수구 덮개 아래도 확인해야 했다. 덮개를 들어 올리자 안쪽 벽에는 젖은 흙이 얇게 붙어 있었고, 물이 빠지는 틈에는 낙엽 줄기 몇 개가 가로로 걸려 있었다. 손으로 잡아당기니 줄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엉킨 풀과 흙이 한 덩이로 따라 나왔고, 생각보다 긴 뿌리 하나까지 딸려 나왔다. 안쪽을 깊게 건드리지는 않고 입구에서 손에 잡히는 것만 꺼낸 뒤, 물 한 바가지를 천천히 부어 흐름을 살폈다. 처음에는 흙물이 차올라 다시 막힌 줄 알았지만, 잠시 뒤 수위가 내려가며 안쪽에서 낮고 긴 물소리가 났다. 두 번째 물은 머무르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됐다. 뒤집어 놓은 흙은 그대로 두면 다음 비에 다시 홈으로 흘러들 것 같아 삽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너무 세게 다지면 물이 스며들지 않을 듯했고, 느슨하게 두면 빗방울만 맞아도 가장자리가 허물어질 듯해 힘을 조절하기가 애매했다. 몇 번 눌러 본 뒤 발로 밟지는 않고 손바닥으로 표면만 고르게 쓸었다. 젖은 흙은 매끈하게 정리된 순간보다 손을 뗀 뒤가 더 지저분했고, 장갑 자국과 삽날 자국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남았다. 홈 가장자리에는 작은 자갈을 띄엄띄엄 놓아 흙이 바로 무너지지 않게 했다. 보기에는 임시로 만든 물길 같았지만 실제로도 임시가 맞았다. 비가 한번 더 와야 알 수 있었다. 정리를 마친 뒤 마당 끝에서부터 천천히 물을 흘려 보냈다. 물은 처음 파 둔 홈을 따라오다가 중간의 넓어진 자리에서 잠깐 퍼졌고, 곧 가장 낮은 쪽을 찾아 다시 한 줄로 모였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새는 물은 없었지만, 배수구 바로 앞에서 속도가 줄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부분의 홈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낮추자 남아 있던 물까지 얇게 끌려갔다. 흙탕물이 빠진 뒤에는 바닥에 반짝이는 물막만 남았고, 그것도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색을 잃었다. 삽과 장갑을 씻고 돌아왔을 때는 아까 검게 고였던 자리가 군데군데 갈색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직 끝은 아니었다. 한동안 비 소식이 없으면 지금 만든 홈이 먼저 말라 갈라질 수도 있고, 다음 비가 세게 내리면 자갈 몇 개쯤은 금방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홈을 더 깊이 파거나 배수구 주변을 넓히는 일은 오늘 할 일이 아니었다. 물이 지나간 흔적을 한번 본 뒤에야 어느 쪽을 더 손봐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삽자루에 남은 흙을 마지막으로 털어 내고, 배수구 덮개가 흔들리지 않는지만 발끝으로 확인했다. 마당에는 파낸 흙 냄새가 눅눅하게 남아 있었고, 얕은 물길은 흐르지 않을 때 더 선명해 보였다. 다음 비가 오면 창밖보다 먼저 그 홈을 보게 될 듯했다. 물길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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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오후
아침부터 비가 가늘게 내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라면 창을 닫고 다른 일에 마음을 붙였을 텐데, 오늘 비는 자꾸 바깥을 보게 만드는 쪽이었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이 한참을 버티다가 아래로 미끄러졌고, 먼저 내려간 자국을 따라 작은 물방울들이 뒤늦게 흘렀다. 흐린 날에는 시간이 조금 눅눅해지는 기분이 든다. 급할 것도 없는데 괜히 시계를 두 번 보고, 아직 이만큼밖에 지나지 않았나 싶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오늘이 딱 그랬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어 물을 올렸다. 국물까지 거창하게 만들 마음은 없어서 말린 잎을 조금 넣고 오래 우렸는데, 예상보다 쓴맛이 강했다. 꿀을 넣을까 하다가 찬장을 열어 보니 바닥에 굳은 설탕만 남아 있었다. 숟가락 끝으로 몇 번 긁어 넣었더니 단맛은 별로 없고 사각거리는 소리만 컸다. 그래도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으면 무언가 제대로 쉬고 있다는 느낌은 났다. 맛보다 온도가 나았다. 며칠 전부터 보던 드라마를 이어 틀었다. 등장인물들은 오해가 생길 때마다 설명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계속 눌렀다. 말을 한마디만 더하면 끝날 일을 여섯 회쯤 끌고 가는 데에는 대단한 인내가 필요해 보였다. 화면 속 빗소리와 창밖 소리가 섞이자 어느 쪽이 진짜인지 잠깐 헷갈렸다. 자막을 놓쳐 십 초를 되돌렸는데, 다시 봐도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 장면이 오래 남는다. 줄거리는 벌써 흐릿하다. 한 회가 끝난 뒤에도 화면을 끄지 않고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다음 회가 저절로 시작되기까지 남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멈춤을 눌렀다. 꼭 보고 싶어서 본다기보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편함 때문에 계속 틀어 두는 날이 있다. 오늘은 선택하는 일 자체가 조금 귀찮았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젖은 수건을 지금 널지, 불을 켤지 말지 같은 사소한 것도 전부 결정처럼 느껴졌다. 몇일 전에는 반대였다. 가만히 있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참, 그날 오래된 서류 봉투를 열었다가 숫자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호봉이 한 칸 오른 표시보다 눈이 먼저 간 곳은 따로 있었고, 관사가 나온 뒤 매달 빠져나가던 큰 금액 하나가 사라진 일이 훨씬 선명했다. 표의 맨 아래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니 지난달과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기뻐서 웃었다기보다는 어깨를 누르던 손이 잠깐 떨어진 듯했다. 종이는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오래 볼 일은 아니었다. 숫자를 확인하고도 사고 싶은 것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새 그릇을 살까, 두꺼운 이불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어느 것도 급하지 않았고, 막상 주문 화면을 열자 색을 고르는 일부터 피곤했다. 대신 장바구니 안에 오래 들어 있던 말린 과일을 하나 지웠다. 없어진 금액이 생긴 금액처럼 느껴지는 건 묘했다. 손에 들어온 것은 같은데 마음속 계산에서는 전혀 다른 칸에 놓였다. 왠지 숨이 길어졌다. 그 정도면 됐다. 드라마를 멈춘 채 싱크대 쪽으로 가서 늦은 끼니를 만들었다. 양파를 반으로 가르니 매운 향이 올라왔고, 눈물이 날 만큼은 아니어서 괜히 한 조각을 더 잘게 썰었다. 팬에 기름을 두르자 빗소리가 잠시 묻힐 정도로 요란하게 튀었다. 달걀 가장자리가 먼저 익고 가운데는 오래 흔들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까 화면 속 인물들의 느린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소금을 너무 일찍 넣어 물이 생겼지만 그냥 밥 위에 올렸다. 모양은 금세 무너졌다. 김이 오르는 그릇을 들고 다시 창가에 앉았다. 처음보다 빗줄기가 굵어져 맞은편 풍경이 희게 번졌고, 유리 아래쪽에는 물이 한 줄로 고여 있었다. 한 숟갈을 뜨고 너무 뜨거워 한참 입안에서 굴렸다. 양파는 덜 익어 조금 아삭했고 달걀은 짰지만, 이상하게 손을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음식은 맛있을 때보다 배가 고팠을 때 더 빨리 줄어든다. 그릇 바닥이 곧 보였다. 비는 여전했다. 설거지는 바로 하지 않고 물만 받아 두었다. 따뜻한 물 위로 기름이 얇게 퍼지다가 가장자리로 밀렸고, 작은 거품 몇 개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아까 마시던 잔도 함께 담그자 굳어 있던 설탕 알갱이가 천천히 풀렸다. 화면에서는 멈춰 둔 장면 속 사람이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재생을 누를까 하다가 리모컨을 뒤집어 놓았다. 창문에 흐르는 물자국을 조금 더 봤다. 아직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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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던 정류장의 오후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각에 면사무소 앞 정류장에 차를 세웠다. 반납할 책을 뒷좌석에 실어 둔 채 사무실로 가 버린 것이 벌써 사흘째였고, 오늘은 아예 가방 위에 올려 두고 나왔다. 버스가 들어오는 시간도 아닌데 정류장 의자에는 낡은 장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인지 누가 잠깐 잊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괜히 가까이 가지 않고 차 안에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맞은편 화단에는 여름내 무성하던 잎이 반쯤 꺾여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줄기끼리 가볍게 부딪쳤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정류장 뒤 게시판에는 지난달 행사 안내와 농기계 점검 날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모서리가 들린 종이는 테이프를 덧댄 자리까지 누렇게 변했고, 그 아래 새로 붙인 공고만 흰빛이 또렷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반납할 책 두 권을 챙긴 뒤 장바구니를 다시 한번 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안에는 접은 우산과 빈 반찬통이 들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작은 수건이 묶여 있었다. 누군가 다시 찾으러 올 모양새라 의자 끝으로 밀어 두기만 했다. 버스 한 대가 정읍 쪽으로 지나가며 먼지를 낮게 일으켰고, 정류장은 금세 전과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읍내 도서관까지는 막히지 않으면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낮은 창고를 지나고, 신호가 하나씩 늘어나는 지점부터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오전에 정리하던 검토표의 빈칸이 자꾸 떠올랐지만 운전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기로 했다.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을 차 안까지 데려오면 주차할 때도 마음이 부산해진다. 조수석에서는 책 모서리가 회전할 때마다 종이봉투를 긁었고, 그 사소한 소리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오늘도 같은 길이었다. 도서관 앞 거리는 장이 서지 않는 날이면 공간이 조금 남아도는 듯 보인다.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 앞에는 빈 플라스틱 상자가 포개져 있었고, 평소 좌판이 들어서는 자리에는 빗자루 자국만 길게 남았다. 주차선 안에 차를 넣고도 바로 내리지 않은 채, 전면 유리에 붙은 작은 먼지들이 햇빛을 받는 것을 보았다. 집에서는 남편이 오래된 수납장을 옮겨 보겠다고 했는데 아침에 벌여 둔 모양 그대로일 가능성이 컸다. 돌아가면 거실 한가운데 놓인 서랍부터 같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났고, 그러자 반납함까지 걷는 일이 갑자기 아주 간단해졌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대 옆 반납 기계에서 짧은 확인음이 났다. 첫 번째 책은 바로 처리됐지만 두 번째 책은 바코드를 몇 번이나 다시 읽혀야 했고, 나는 책등을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 내린 뒤 방향을 바꿔 넣었다. 대출 기간을 연장해 놓고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중간에 꽂아 둔 영수증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펼쳐 보니 한 달 전 읍내에서 산 두부와 대파 가격이 적혀 있었다. 책보다 그날 저녁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그래도 영수증은 버리지 않고 가방 안쪽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반납을 마친 뒤에는 서가를 한 바퀴만 돌 생각이었다. 새로 들어온 책 앞에서 오래 멈추지 않으려고 손을 뒤로 모았는데, 표지가 어두운 산문집 한 권을 보고 결국 꺼내 들었다. 몇 쪽을 넘기는 동안 창가 자리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는 신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나는 책을 빌릴지 말지 정하지 못한 채 창밖의 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장날이면 천막과 사람 사이로 겨우 보이는 건너편 간판이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 있었다. 비어 있으니 더 낯설었다. 결국 산문집은 다시 꽂고 얇은 사진책 한 권만 빌렸다. 읽으려는 마음보다 집에 가져가 식탁 한쪽에 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데, 그런 이유도 대출 사유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밖으로 나오니 아까보다 그림자가 길어져 주차선 두 칸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차 문을 열기 전 가방 속 영수증을 다시 만져 보았고, 반납할 때 빼놓은 것은 없는지 괜히 뒷좌석까지 확인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면사무소 앞을 다시 지나게 된다. 장바구니가 그대로 있을지부터 보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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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를 넘기고 남은 것
파일을 넘기고 나니 화면 오른쪽 아래의 시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몇 번이나 봤을 텐데 숫자가 낯설어서 잠깐 다른 날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키보드에서 떼고도 한동안 자세를 바꾸지 못했다. 끝냈다는 안도보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은 공백이 더 컸다. 창밖은 비가 올 듯 말 듯 흐렸고, 유리에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별일 없는 오후였다. 머릿속에는 수정한 표와 지웠다가 다시 넣은 문장들이 여전히 떠다녔다. 이미 넘긴 것을 다시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그러면 끝이 끝이 아니게 된다. 화면을 닫고 미지근해진 물을 마셨다. 컵 바닥에 남은 한 모금은 이상하게 쇠 맛이 났다. 오전에 먹다 둔 과자 봉지는 입구가 벌어진 채였고, 눅눅해진 조각 하나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제야 배가 고팠다. 뭘 먹을지 생각하다가 냉장고 안의 애호박 반쪽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는 분명 단단했는데 오늘까지 두면 가장자리가 물러질 것 같았다. 국수를 삶고 애호박을 얇게 썰어 넣으면 그럭저럭 한 끼가 된다. 매운 양념은 내키지 않아 간장과 식초만 조금 섞기로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의자에서 일어날 힘이 생겼다. 배고픔은 단순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과제 보고서를 넘기고 나서야 시험포에 심어둔 걸 한 번도 못 봤다는 걸 알았다. 심었다는 말을 들은 날과 중간에 사진 몇 장을 넘겨본 기억은 있는데, 흙 위에서 자라는 모습은 내 기억에 없었다. 종이에는 날짜와 수치가 가지런히 들어갔고 빠진 칸도 없이 끝났는데, 정작 한 철의 빛깔은 건너뛴 셈이었다. 그 사실이 서운한지 우스운지 바로 정해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메모장 구석에 짧게 적어두었다. 늦게 알아챘다. 부엌으로 가니 아까보다 바깥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형광등을 켜지 않고 물부터 올렸더니 냄비 안쪽에 회색빛이 고였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애호박을 썰었는데 첫 조각은 지나치게 두껍고 다음 조각은 종잇장처럼 얇았다. 굵기를 맞추려다 오히려 손이 느려졌다. 꼭 고르게 썰 필요도 없는데 이런 날에는 사소한 모양이 자꾸 눈에 걸린다. 칼끝만 바빴다. 국수를 넣자 냄비 위로 김이 한꺼번에 올라와 얼굴을 덮었다. 서늘했던 손등이 금세 따뜻해졌고, 끓는 물 냄새가 방 안의 눅눅한 공기를 밀어냈다. 면 한 가닥을 건져 씹어 보니 가운데가 조금 단단했다. 삼십 초쯤 더 두려다가 깜빡할까 봐 그냥 불을 껐다. 너무 익은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찬물에 헹구고 나니 예상보다 더 꼬들했다. 그래도 먹을 만했다. 간장에 식초를 붓다가 손이 미끄러져 식초가 조금 많이 들어갔다. 설탕을 넣으면 맛이 정리될 것 같았지만 단맛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참기름을 아주 조금 떨어뜨리고 오래 섞었다. 양념이 면 사이로 퍼지는 동안 애호박은 뜨거운 김에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아삭한 쪽과 흐물한 쪽이 한 그릇에 섞여 있었다. 오늘은 그런 맛이었다. 첫 젓가락은 시었고 두 번째는 싱거웠다. 세 번째쯤 가니 혀가 익숙해졌는지 별 불만이 없어졌다. 먹는 동안에는 화면도 켜지 않았고, 아까 적어둔 메모도 다시 보지 않았다. 빗소리를 기다렸지만 비는 끝내 오지 않았고 어두워진 유리만 조용히 식었다. 한참동안 비어 있던 머릿속에 국물 없는 면을 씹는 소리만 남았다. 그 정도면 됐다. 그릇 바닥에는 애호박 두 조각과 잘린 면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배가 부른데도 남기기 애매해서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먹었다. 마지막 조각은 처음 썬 두꺼운 것이었고, 가운데가 덜 익어 풋내가 났다. 물을 한 잔 더 따르다가 싱크대 옆에 튄 식초 자국을 발견했다. 행주로 한 번 문질렀지만 희미한 얼룩이 남았다.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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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쉬는 날 도서관에 갔다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의 읍내는 평소보다 넓어 보인다. 차를 세워 두고 면사무소 앞 정류장 쪽으로 걸었는데, 장날이면 좌판과 손수레가 차지하던 자리에 바랜 주차선만 반듯하게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류장 의자 아래로 마른 전단 한 장이 들어갔다 나왔고, 맞은편 철물점 앞에는 묶어 둔 빗자루가 가지런히 기울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표 옆 투명 덮개에는 오래된 테이프 자국이 겹쳐 있었고, 그 위로 오전 햇빛이 비스듬히 걸렸다. 조용한 날이었다. 정류장 뒤편의 작은 화단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한 뼘쯤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종이컵이 돌 틈에 끼어 있어 주워 들었더니 안쪽에 빗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근처 쓰레기통까지 몇 걸음 옮기는 동안 빈 도로를 화물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고, 차가 사라진 뒤에도 엔진 소리가 건물 사이에 잠깐 머물렀다. 장날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약국 유리문에는 휴무 안내가 붙어 있었고, 옆 가게 차양 아래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앞발을 모은 채 졸고 있었다. 읍내가 통째로 낮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 갈 생각은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있었지만 서둘러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평일 낮의 빈 거리는 볼 일이 끝나면 곧장 차로 돌아가던 때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괜히 한 블록을 더 돌아보게 된다. 떡집의 불은 꺼져 있었고 유리 안쪽에 놓인 빈 쟁반만 보였으며, 문구점 앞 회전 진열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반 바퀴씩 늦게 움직였다. 영월에서 왔다는 택배 차량이 골목 입구를 잠깐 막았다가 금세 빠져나갔다. 길을 건너면서 신호등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끝까지 바라봤다. 급할 것은 없었다. 도서관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의 건조한 바람 대신 종이와 바닥 세정제 냄새가 섞인 공기가 닿았고, 신발 밑창에서 작게 마찰음이 났다. 안내대 직원은 반납된 책에 도장을 찍고 있었으며 어린이 자료실 쪽에서는 의자를 끄는 소리가 한 번 들렸다. 나는 가방에서 지난번에 빌린 책 두 권을 꺼냈다. 한 권은 모서리가 조금 닳아 있었고 다른 한 권에는 읽던 자리를 표시하려 끼워 둔 영수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참만에 펼쳐 본 종이였다. 반납 처리된 책이 수레에 실리는 동안 창가 자리에 앉아 빈 거리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 지나온 정류장의 초록 지붕이 건물 사이로 작게 보였고, 그 앞에는 어느새 장바구니를 든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버스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지 그 사람은 시간표를 보고도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도로 끝을 자꾸 살폈다. 책을 고르러 왔는데 한동안 서가로 가지 못했다. 유리창 안쪽은 따뜻했고 바깥의 깃발은 쉬지 않고 펄럭여서, 같은 오후가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르게 흐르는 듯했다. 문제는 책이었다. 빌려 갈 책을 세 권까지만 고르기로 했는데 손에 든 것은 금세 다섯 권이 되었다. 제목을 읽다가 전에 읽은 책과 비슷해 보이면 다시 꽂고, 표지가 지나치게 새것이면 몇 장 넘겨 본 뒤 아래 칸에 내려놓았다. 연구실에서 종일 짧은 문장과 숫자만 들여다본 날에는 긴 이야기를 집어 들고 싶어지지만, 막상 집에 가져가면 첫 장에서 멈출 때도 많다. 오늘은 얇은 산문집 한 권과 오래된 소설 두 권을 남겼다. 책등에 붙은 분류표가 여러 번 손을 탄 흔적으로 희미했고, 대출 기계 위에는 누군가 연필을 두고 갔다. 그것으로 됐다. 도서관을 나왔을 때는 정류장 앞에 서 있던 사람도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빈 거리에는 오후 햇빛이 조금 더 길게 누워 있었고, 닫힌 가게 셔터의 굴곡마다 밝은 줄과 어두운 줄이 번갈아 생겨 있었다. 장이 없는 날에는 살 것도 구경할 것도 적지만, 대신 내가 걷는 속도가 또렷하게 느껴진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 종이봉투 속 책 모서리가 허벅지에 몇 번 부딪혔고, 정류장 의자 아래를 맴돌던 전단은 아까와 다른 쪽 배수구에 걸려 있었다. 주차장에는 내 차를 포함해 세 대가 남아 있었다. 시동을 걸기 전, 반납 영수증을 접어 가방 안쪽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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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일을 자꾸 늦추던 책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빌릴 책을 따로 정해 둔 것은 아니었다. 입구 옆 반납함에 책 몇 권이 비스듬히 포개져 있었고, 안쪽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마른 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새로 들어온 책이 놓인 낮은 서가부터 천천히 훑었지만 표지가 반듯한 책에는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한 바퀴를 다 돌고도 빈손이라 이번에는 오래된 책들이 몰려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바랜 푸른색 표지 한 권을 꺼냈다. 우연히 고른 책이었다. 책등의 글자는 절반쯤 닳아 있었고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종이처럼 부드러웠다. 첫 장에는 도서관 도장이 겹겹이 찍혀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날짜는 잉크가 번져 숫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가 언제 빌렸는지 적던 종이 봉투도 뒤표지 안쪽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대출 기록은 지워졌지만 봉투 아래쪽에는 연필로 눌러 쓴 짧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내용과 상관없는 흔적이었다. 그래도 한참을 들여다 봤다. 그 선이 이상했다. 서가 앞에 선 채로 첫 문단을 읽고 다음 장까지 넘겼다. 이야기는 비가 멎은 뒤 어느 집의 창문을 여는 장면에서 시작했는데, 특별한 사건은 없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냄새와 젖은 바닥의 빛만 오래 묘사되어 있었다. 사건이 빨리 시작되는 책을 찾았다면 도로 꽂았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그 느린 첫 장이 싫지 않았다. 책을 덮자 먼지가 손바닥에 묻었다. 대출대에서는 반납 날짜가 찍힌 종이만 받아 책 사이에 끼웠다. 아직은 얇은 종이였다. 돌아와서는 곧바로 읽지 않고 책을 평평한 곳에 내려두었다. 푸른 표지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첫 장의 열린 창문이 떠올랐지만, 막상 펼치면 오래 읽게 될 것 같아 몇 번이나 지나쳤다. 그러다 늦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문장은 조용했고 등장하는 사람들은 해야 할 말을 자주 삼켰다. 설명되지 않은 침묵이 이어질 때마다 앞장을 다시 넘겼으나 놓친 문장은 없었다. 원래 그런 이야기였다. 삼십 쪽쯤 읽었을 때 책 사이에서 대출 종이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종이를 주워 날짜를 확인하고서야 이미 며칠을 책상 위에만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은 쪽수를 세어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하루에 얼마씩 읽으면 되는지 계산하려다가 그만두고 책갈피를 중간에 끼웠다. 빨리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뒤부터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줄을 세 번 읽었다. 날짜가 방해했다. 다음 날에는 대출 종이를 뒤표지 봉투 안으로 밀어 넣고 보이지 않게 했다. 반납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펼칠 때마다 먼저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 뒤로는 한 번에 열 장을 읽기도 했고 두 장만 읽고 덮기도 했다. 이야기 속 방들은 조금씩 비어 갔으며 처음에 열렸던 창문은 좀처럼 다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창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책의 절반을 넘긴 뒤에야 알아차렸다. 왜 기다리는지는 몰랐다. 그냥 계속 읽었다.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첫 장의 창문이 다시 언급되었다. 누군가 창틀에 남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닦았다는 한 문장이 전부였고, 오래 기다린 것에 비하면 너무 짧았다. 앞에서 쌓인 일들이 그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덮어 둔 장면 하나를 잠깐 확인하고 지나가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그 대목에서 책을 덮고 푸른 표지를 오래 바라봤다. 끝까지는 스무 쪽이 남아 있었다. 그날은 거기까지였다. 반납일 아침에 남은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 장에는 누군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면도 없었고, 처음부터 이어지던 방 안의 빛이 조금 옮겨 갔다는 문장만 남아 있었다. 다 읽었다는 표시로 대출 종이를 꺼내려다 뒤표지의 낡은 봉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연필로 눌러 쓴 선은 여전히 아무 뜻도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그 옆에 손톱만 한 종이 보풀이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눌렀다가 멈췄다. 떼지는 않았다. 도서관에 책을 돌려주러 갔을 때 반납함 입구가 생각보다 좁았다. 책을 밀어 넣으면 안쪽 경사면을 따라 금세 미끄러졌고, 푸른 표지는 다른 책 아래로 사라졌다. 손에 남은 것은 접힌 대출 종이 한 장뿐이었다. 그것도 버리려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빌릴 생각은 없었지만 책의 첫 문장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했는지 벌써 희미했다. 창문이 먼저였는지 비 냄새가 먼저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종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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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호박을 오래 저은 아침
아침부터 비가 올 듯 말 듯 하더니 창문에 붙은 빛이 종일 묽었다. 이런 날은 물을 끓이기도 전에 따뜻하고 무거운 것이 먹고 싶어진다. 찬장 안쪽에서 늙은호박 한 덩이를 꺼내 놓고도 한참 손을 대지 않았다. 껍질을 벗기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단단한 것을 자를 때 나는 둔한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릴 듯했다. 결국 칼 대신 숟가락부터 찾고 앉아 씨를 긁어낼 그릇을 골랐다. 시작은 늘 엉뚱하다. 호박은 겉만 보고 짐작했던 것보다 속이 진했고, 씨 주변의 가느다란 실이 손가락에 끈질기게 붙었다. 한꺼번에 떼어 내려 할수록 더 엉켜서 조금씩 잡아당겼는데, 그러는 사이 끓여 둔 물이 식었다. 다시 물을 올리고 노란 조각들을 냄비에 넣으니 부엌에 젖은 풀 같은 냄새가 잠깐 돌았다. 단맛을 기대했는데 첫 냄새는 전혀 달지 않아 조금 실망했다. 음식은 완성되기 전까지 여러 번 못생겨진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아직은 호박물이었다. 푹 익은 조각을 주걱으로 눌러 으깨자 그제야 색이 부드러워졌다. 쌀가루를 물에 풀면서 양을 재지 않았더니 처음에는 너무 묽고, 한 숟갈을 더 넣은 뒤에는 지나치게 되직해졌다. 물을 보태고 다시 저었다가 소금을 한 꼬집 넣고, 모자란 듯해 또 집었다가 손을 멈췄다. 한 번 짜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음식 앞에서는 유난히 또렷하다. 설탕은 조금만 넣으려 했는데 봉지 입구에서 덩어리가 떨어져 계획보다 많이 들어갔다. 뭐든 마지막 한 번이 문제다. 냄비 바닥이 눌어붙지 않게 계속 저으면서 어젯밤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별일 아닌 대화를 오래 끌던 두 사람이 끝내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각자의 문을 닫았는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남았다. 큰 사건보다 대답하기 직전의 얼굴이나 컵을 내려놓는 손 같은 것이 더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장면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침묵이 길어지면 금세 불편해한다. 국자를 세워 둔 채 잠깐 딴생각을 했더니 바닥에서 작고 둔한 기포가 연달아 터졌다. 소리는 뜻밖에 다정했다. 불을 가장 약하게 줄인 뒤에는 창밖이 아까보다 밝아졌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비가 오면 올 것이지 이렇게 오래 망설이는 날씨는 사람까지 쓸데없이 기다리게 한다. 빨래도 없고 특별히 나갈 일도 없는데 하늘의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말 나온 김에 아침마다 지나는 둑길도 이런 날에는 색이 하나뿐인 것처럼 보인다. 읍내까지 이십 분. 그 시간이 아까워 라디오를 끄고 생각을 정리한다. 대단한 결론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전날 마음에 걸린 말이 정말 중요했는지 순서를 다시 붙여 보는 정도다. 오늘은 호박죽 생각뿐이었다. 다시 냄비 앞으로 돌아왔을 때 표면에는 얇은 막이 생겨 있었다. 주걱으로 한 바퀴 크게 젓자 막이 접히며 사라졌고, 그 아래의 색은 처음보다 훨씬 짙었다. 그릇을 데우려고 뜨거운 물을 부어 놓은 일은 잘한 선택이었다. 따뜻한 죽을 차가운 그릇에 담으면 첫 숟갈부터 온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싫다. 가장자리에 묻은 것을 천천히 닦고 가운데에 잣 몇 알을 올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장식이 거슬렸다. 첫 숟갈은 예상보다 달았고 두 번째에는 소금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세 번째쯤 먹으니 어느 쪽도 신경 쓰이지 않아졌고, 혀보다 손이 먼저 다음 숟갈을 떴다. 뜨거운 것을 급하게 먹지 않으려 창가 쪽을 바라보았는데 유리에는 빗방울 대신 흐린 먼지만 붙어 있었다. 비를 기다렸다는 사실도 그제야 우스워졌다. 날씨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기다리고 혼자 마음을 바꾼 셈이다. 죽은 천천히 줄었다. 남은 것은 작은 그릇 두 개에 나누어 담고 완전히 식을 때까지 뚜껑을 덮지 않았다. 냄비 바닥에는 주걱이 지나간 자국이 둥글게 남았고, 가장자리 한곳만 아주 옅게 눌어 있었다. 그 부분을 긁어 먹으니 단맛보다 고소한 맛이 먼저 났다. 잘 만든 한 그릇보다 마지막에 남은 얇은 누룽지가 더 마음에 드는 날도 있다. 비는 끝내 오지 않았고 흐린 빛만 조금씩 걷혔다. 식은 냄비를 물에 담가 두었다. 노란 자국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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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봉투를 펼쳐 둔 저녁
텃밭에 무엇을 심을지 정하려고 씨앗 봉투와 빈 종이를 한꺼번에 꺼내 놓았다. 해마다 고르는 일은 금방 끝날 듯하면서도 막상 시작하면 오래 걸린다. 잎이 무성한 것, 열매를 기다려야 하는 것, 자리를 오래 차지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옮겨 보았다. 종이 위에는 상추, 오이, 가지, 고추가 차례로 적혔다가 두 줄씩 그어졌다. 심기도 전에 밭이 꽉 찼다. 욕심이 먼저 자랐다. 상추는 빼기 어려웠다. 씨를 조금만 뿌린다고 해놓고 손끝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한곳에 몰아 떨어뜨리는 장면까지 벌써 떠올랐다. 솎아 낸 어린잎도 먹을 수 있으니 괜찮다는 핑계는 늘 준비되어 있다. 다만 한꺼번에 올라온 잎을 제때 거두지 못하면 금세 억세지고, 그제야 너무 많이 심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올해는 봉투를 반도 열지 않겠다고 종이 한쪽에 작게 적었다. 지킬지는 모르겠다. 오이는 울타리를 세워야 해서 망설여졌다. 줄기가 기대어 올라갈 곳을 만들어 주면 바닥을 덜 차지하지만, 처음부터 자리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덩굴이 제멋대로 옆으로 누웠다. 누운 줄기를 다시 들어 올릴 때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몰라 한참 손을 멈추곤 했다. 그래도 잎 아래 숨어 있던 작은 오이를 발견하는 순간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어제는 없던 것이 손가락만큼 길어져 있는 광경은 매번 조금 이상하다. 그래서 두 포기만 남겼다. 가지와 고추 사이에서는 연필 끝이 오래 머물렀다. 둘 다 심으면 간단한데, 그렇게 하나씩 받아 주다 보면 좁은 밭에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진다. 가지는 윤이 나는 짙은 껍질 때문에 끌렸고, 고추는 자주 따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놓기 어려웠다. 수확한 뒤의 쓸모까지 따져 적다 보니 씨앗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지도 않은 계절을 배분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가지 두 포기와 고추 세 포기로 적었다. 숫자는 자꾸 바뀌었다. 참, 뿌리채소도 한 줄쯤 넣고 싶었다. 무는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당근은 싹이 더디게 올라오니 둘 다 선뜻 고르기 어려웠다. 씨를 뿌려 놓고 며칠 동안 빈 흙만 바라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잡초인지 새싹인지 구별하지 못해 손가락으로 흙 가까이를 들여다보던 일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땅 아래에서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잎채소와 다른 기다림을 준다. 당근 한 줄을 적었다. 종이에 네모를 그려 대강의 밭 모양을 만들고, 적어 둔 이름을 그 안에 옮겼다. 햇빛을 가릴 만큼 커지는 것은 뒤쪽으로 보내고 자주 손이 가는 것은 가장자리로 당겼다. 오이 두 포기가 생각보다 넓은 자리를 먹었고, 가지와 고추 사이에도 손을 넣을 간격이 필요했다. 상추는 남는 곳에 끼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남는 곳이 거의 없었다. 한 칸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종이가 먼저 닳았다. 다음날에는 종이를 들고 텃밭 앞에 섰다. 책상 위에서 반듯했던 네모는 실제 흙 앞에서 별 쓸모가 없었고, 가장자리도 생각보다 비뚤었다. 발을 들여놓을 길을 남기고 팔이 닿는 거리를 재어 보니 전날의 배치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흙 위에 가느다란 막대로 선을 긋고, 그 선을 밟아 없앤 뒤 조금 옆에 다시 그었다. 한 번 쯤은 계획대로 심어 보고 싶었지만 밭은 종이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선만 여러 개 남았다. 상추 자리는 처음 생각한 것보다 줄이고 당근 한 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오이는 울타리를 세울 쪽으로 붙이고, 가지와 고추는 잎이 겹치지 않을 만큼 떨어뜨렸다. 빈 구석이 생기자 다른 씨앗을 더 넣고 싶은 마음이 바로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흙이 보이는 자리를 남겨 두는 것도 배치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씨앗 봉투는 아직 뜯지 않았다. 오늘은 고르기만 했다. 봉투를 다시 늘어놓으니 제외한 것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보였다. 호박은 넓게 뻗을 것이고, 깻잎은 몇 포기만 있어도 씨가 떨어져 다음 철에 불쑥 나타날 수 있다. 방울토마토는 끝까지 망설였으나 지지대를 세울 자리가 모자라 봉투째 서랍으로 돌아갔다. 심지 않기로 한 이름 옆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남아 있어 완전히 포기한 표시는 아니었다. 며칠 뒤 흙을 고르다 보면 빈틈이 더 커 보일지도 모른다. 아직 종이는 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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